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오코스 3세 (문단 편집) ===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광과 함께 암울한 소식 역시 존재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로마와 대결하여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깡패마냥 휘젓고 다니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로마군에 의해 간단히 압살당한 것은 동부 지중해 세계에 큰 경종을 울렸다. 필리포스 5세는 수도 펠라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그동안 필리포스 5세가 애써 키워놓은 마케도니아의 촌락을 약탈하고 다녔다. 필리포스 5세는 이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항전한 이유는 안티오코스 3세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마침 팔레스티나에서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던 상황이었고, 페르가몬 왕국에 군대를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필리포스 5세를 도울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필리포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로마에 항복하여 그 보호국이 됨으로써 동맹을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는 곧 로마에 더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그리스 내의 분쟁에서 언제나 필리포스 5세의 반대편을 들었고, 이런 불만은 계속 쌓여가 종국에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안티고노스 왕조가 반(反)로마의 기치 아래 다시 비밀리에 우호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유다는 로마인들의 명성을 들었다. 그들은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저희 편에 서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호의를 베풀고, 저희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누구와도 우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말 대단히 강하다는 것이었다. 유다는 또 그들이 갈리아인들과 용감하게 싸워 그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에스파냐 지방에서 그곳의 은광과 금광을 점령하려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로마인들은 그 지방이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계획대로 끈기 있게 그곳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고 세상 끝에서 쳐들어온 임금들을 무찌르고 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다른 임금들은 그들에게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 그들은 또 키팀 임금 필리포스와 페르세우스를 비롯하여 자기들에게 반항하는 자들과 싸워서 그들을 무너뜨리고 정복하였다. 그리고 코끼리 백이십 마리와 기병대와 병거대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싸우러 온 아시아 임금 대안티오코스도 쳐부수었다. 그들은 안티오코스를 사로잡아 그와 그의 뒤를 잇는 임금들이 많은 조공과 인질을 바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도, 메디아, 리디아 등 가장 좋은 지방을 안티오코스에게서 빼앗아 에우메네스 임금에게 주었다. 《성경》 <[[마카베오 상권]]> 8장 1~8절|| BC 196년, 시리아 전쟁이 매듭지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되었다. 파니온 전투로 인해 역전된 역학관계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할 때까지 계속된다. BC 198년, 시리아 전쟁과는 별도로 안티오코스 3세는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다. 이는 오히려 그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BC 197년에는 이오니아 도시국가가 거의 모두 안티오코스 3세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들 중 몇몇이 로마에 지원을 청했고, 양 강대국간의 적대감이 본격화되었다. BC 196년,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에 상륙했고, 여기서 자신의 종주권을 선언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대 영토는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리스는 권력의 공백상태로 안티오코스 3세의 트라키아 합병 선언에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다. 트라키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 시조 셀레우코스 1세가 트라키아를 점령한 적이 있음을 들어 정당성을 주장했다.]으로써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관계 악화가 상당히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행보 속에서,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니발 바르카|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궁정에 망명 신청을 낸 사건'''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한니발의 활약에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것이 그 자신에 걸맞은 대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싶어 했으나, 그가 나중에 이끈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당시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사람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돌아오지 않고 왕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이 계획은 철회된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므로 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 적어도 카르타고는 그에게 복속될 게 뻔한데, 그 때도 한니발이 신하로 남아 있으려 했을까? 여러모로 한니발에게 독립된 지휘권을 주지 않은게 멍청한 결정이라 보긴 어렵다. 안티오코스 3세가 너무 쉽게 말아먹어서 문제였지만.] BC 191년, 때마침 로마에 불만이 많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사령관으로 안티오코스 3세를 선출하자 그는 군대 10,000명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지난날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이겼던 바로 그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191년)|테르모필레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군은 숫자도 많았고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포위당했으므로, 10,000명이 거의 다 죽는 참사 끝에 안티오코스 3세만 병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시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지중해 서쪽 최대의 군사대국과 처음으로 맞붙는 중요한 순간에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것이었다. 한니발에게는 페니키아 해군이 맡겨졌다.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로도스는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가진 국가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페니키아 해군을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격파했다. 한니발의 패배를 접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해군 제독 폴리크세니다스의 지휘하에 함선 90척을 맡겨 [[미오네소스 해전]]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비슷한 수의 로마-로도스 연합 선단과의 싸움은 또다시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이제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군의 아시아 상륙을 제지할 방도가 없어졌다. 양 군은 마그네시아에서 충돌했다. '''셀레우코스 제국 흥망의 분기점이 된 이 회전을 [[마그네시아 전투]]라고 한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총 70,000명 규모로, 카타프락트를 포함한 기병이 12,000명이었으며, 낫 달린 전차, 코끼리 54마리 등 제국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종은 모두 모았다. 총 50,000명 규모인 로마군은 로마-그리스의 혼합 병종으로 무장했으나, 대부분이 로마군이었고, 그리스인은 주로 펠타스토이와 호플리타이로 전투에 참가한 듯 하다. 기병은 5,000명 가량이었다. 결전 장소인 마그네시아는 개활지가 아니라서 기병을 활용하기 적합지 못한 장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좌익에서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전차가 기병의 진군을 방해한 것이다. 그러자 우익에서 안티오코스 3세 자신이 이끄는 카타프락트 부대가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머지 로마군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의 캠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장을 뜻하지 않게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페르가몬]] 왕으로 로마의 동맹 기병을 담당한 에우메네스 2세가 혼란에 빠져있던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좌익으로 돌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다. 중앙에서는 로마군이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와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을 찔러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전투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진지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무너진 이후였다.[* 반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로마군이 궁병과 투석병 등 원거리 병과들을 내세워 셀레우코스 군대의 중무장 보병들을 계속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괴롭히다 지치게 하여 무너뜨렸다고 기록했다.] 리비우스에 의하면 로마군의 피해는 349명에 불과했지만,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50,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단 이 기록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리비우스가 전하는 로마군의 전과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역사학자는 드물다.] 동방을 휘젓고 다니며 '메가스'란 칭호를 받았던 군주의 전과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퍼펙트한 패배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결국 로마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BC 188년, 그는 로마인들과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굴욕적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15,000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새로운 국경선으로 타우루스 산맥이 설정되었다. 제국 해군의 규모 역시 로마의 규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 후일 [[안티오코스 4세]]가 되는 자신의 3남을 로마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되고자 했던 안티오코스 3세의 야망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